환등기

용어사전 2012. 9. 10. 20:31

구한말 외국인 공간 : 정동

환등기

상세설명

활동사진(活動寫眞) 즉 영화의 위력에는 전혀 못 미치지만, 이에 못지않은 신기한 영상매체로 환영받은 대상은 환등기(幻燈機, 슬라이드)였다. 얼마전까지도 학교수업에서 시청각자료로도 즐겨 사용되어 왔던 슬라이드는 영화에 비해서는 정지영상에 불과하나, 복잡한 기계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이동에도 매우 간편하였으므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이겠지만, 슬라이드는 주로 계몽활동이나 강연과 선전과 교육의 도구로 자주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영화의 보조수단으로 스크린에 슬라이드를 비춰주는 일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등기 장치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때는 언제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일찍이 <황성신문> 1899년 12월 22일자에 게재된 '일요환등(日曜幻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영국인(英國人) 뱃콕씨(氏)가 거일요석(去日曜夕)에 흥화학교 주야학원(興化學校 晝夜學員)을 낙동본제(駱洞本第)에 초청(招請)하야 다과(茶果)를 접대(接待)하고 환등방(幻燈房)을 개설(開設)하였는데 차후(此後)에는 매일요석(每日曜夕)에 동씨(同氏)가 해교제학원(該校諸學員)을 초청(招請)하야 환등방(幻燈房)을 제시(提示)한다더라."

그리고 <황성신문> 1900년 12월 5일자에는 '덕교환등회(德校幻燈會)'라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덕교(德校)는 덕어학교(德語學校, 독일어학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금일(今日) 하오(下午) 6시(時)에 덕어학교교사 불야안씨(佛耶安氏)가 덕공사(德公使)와 각부대관(各部大官)을 해교(該校)로 청(請)하야 환등회(幻燈會)를 행(行)할 터이라더라."

여기에서 보듯이 1899년 이후 환등회 관련기사는 드물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아직 활동사진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인지라, '경이로운' 화면에 나름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환등기는 이것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미 국내에서 첫 선을 보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찍이 의료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시병원과 이화학당의 설립에 기여한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施蘭敦, 時奇蘭敦; 1856~1922)이 1887년 4월 17일에 작성한 서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 겨울이 끝날 무렵 외서(外署)의 관리인 어머님의 통역관은 어머님에게 와서 독판(督辦)과 그 관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야한다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에 대해 어머님은 한동안 주저하였으나 우리가 안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관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외서 독판과 그밖의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둘러보고 스크랜튼 부인의 일하는 목적을 좀 더 확실히 알기를 희망하였으므로 끝내는 그렇게 동의하였습니다. 초대장을 띄웠는데 통역관의 중개에 의해 그들의 초청이 어느 날 밤으로 정해졌습니다. 물론 접대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독판과 그 밑의 관료 4명 가운데 3명이 왔습니다. ...... 부인의 일을 돕기 위해 미국의 한 선교지부에서 친절히 보내는 환등기로 미국과 유럽과 성경의 여러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사진들은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이 사진들을 보고자 하였으며 몇번식 보고도 관심이 시들 줄 몰랐습니다. 이날밤 문제의 손님들은 매우 즐거웠던 것 같았습니다. ...... 그가 국왕에게 건의하면서 끊임없이 이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 후 종종 들었습니다. 몇 주일 후 국왕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름 하나를 학교를 위해 고르셨습니다. 국왕은 우리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다소 화려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외서에 명하여 한자를 쓰게 하고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 우리 학교에 이것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우리와 비슷한 승인과 기수가 아펜젤러씨가 경영하는 학교에도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몇 주후에 병원에도 비슷한 방식의 승인이 났습니다. 병원의 이름은 번역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시병원(施病院)을 좀더 간결하게 표현한 유니버설 호스피탈(Universal Hospital)이라고 영어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략)"

이와 아울러 배재학당의 설립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의 일기에도 이와 비슷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1887년 2월 21일]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부대신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혹은 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다. 이 문제는 얼마동안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얼마 전에 대신은 언더우드 목사의 학교에 대해 묻더니 그 학교도 이름을 가져야 하겠다고 했다. 이런 관심에 힘 입어서 개인교사와 학생 한 명을 보내어 언더우드 목사더러 이리 오라고 했다. 그는 집에 없었다. 나는 그 위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에 며칠 내로 오겠다고 했다. 이것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스크랜튼 부인의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녀가 자기 집과 '환등기'를 보여 주려고 그를 불렀을 때였다. 그는 그때 다시 며칠 내로 오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여기에 오지 않았다.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Mr. Kim)가 커다란 한자로 새겨진 학교이름(배재학당)을 가지고 왔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환등기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들이다. 그러니까 이 환등기는 1887년 이전에 미국의 감리회선교부에서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Mrs. Mary F. Scranton, 施蘭敦 大夫人; 1832~1909) 일행에게 보내준 것이었고, 이것을 구경한 조선의 외부관리들이 환상적인 장면에 매료되어 이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1887년 2월 중순 경에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이를 새긴 편액이 잇달아 내려졌으니, 그 공로는 거의 전적으로 '환등기'의 몫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참고자료목록]

- 이화100년사편찬위원회, <이화 100년사 1886~1986> (이화여자고등학교, 1994)
- 경신사편찬위원회, <경신사 1885~1991> (경신중고등학교, 1991)
- 유모토 고이치(湯本豪一)·연구공간 수유+너머 동아시아근대세미나팀, <일본 근대의 풍경> (그린비, 2004)
- <황성신문> 1899년 12월 22일자, "일요환등(日曜幻燈)"
- <황성신문> 1900년 12월 1일자, "퇴정환등회(退定幻燈會)"
- <황성신문> 1900년 12월 5일자, "덕교환등회(德校幻燈會)"
- <제국신문> 1900년 12월 5일자, "덕어학교에서 일전에 환등회를 결행한다 하더니 ......"
- <황성신문> 1901년 10월 25일자, "사설환등(師設幻燈)"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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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등회 기록 1895년 김윤식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a_011_0070_0030_0030

속음청사
續陰晴史 卷七
高宗 32年 乙未 正月~11月(以上 陰曆)
乙未 三月
李鴻章의被槍 對日債款條約 近畿火賊 幻燈戲 柏卓安 日語學堂 齋洞私立學校 佐野前勵 各部官制改正 豫算表
初一日壬申晴佳, 行茶禮, 仕外署, 往唔井上而還, 單蔘湯日再服, 服洋醫止嗽藥, 輪感大熾, 新宅及沁得·福喜, 俱以感冒苦痛, 侍直以贊翊復職, 感祝感祝。 初二日 癸酉陰, 微雨, 仕外署,具禮來談, 聞日前李少荃 (鴻章), 편자주 爲講和, 帶全權使銜, 往日本馬關, 開談幾日, 路上有人放槍, 斜中左頰, 幸不深傷, 然亦爲兩國不幸之事也。 初三日甲戌雨餘峭寒, 仕外署, 赴政府會, 鄭審藥箕營下去便, 付上第三天書。 初五日 丙子晴風, 早赴政府, 姑未會, 轉往貞洞 美館唔談,施逸 公使, 復到政府, 與諸大臣公閱借款約條, 還外署,日本 書記生國分, 與度支主事, 齎約槀來, 蓋外署印, 今番借款,日本政府, 囑銀行, 借我國政府三百萬元, 半銀半紙, 五年爲限, 租稅爲當, 蓋我國, 新經擾亂, 三南·兩四,
<상357>

賦稅無可輸納者, 內外經費, 支撥無術, 故借此巨額於日本者也, 還桂洞, 往觀織造局修理處, 卽日語學堂也, 玄主事來, 與日人敎師吉見正, 適來相唔而歸,印世卿·雲擧來。 初六日 丁丑晴, 空日在家, 素沙以上, 火賊大熾, 道路梗塞, 皆東徒餘黨也。 初七日戊寅晴, 仕外署, 赴政府會, 初八日己卯陰, 微雨, 仕外署,杉村濬來談, 今日腰背痰牽愈甚, 不可耐, 夜熊膽三分重作末和酒服, 肅川生徒便, 承箕營第六天下書。 初九日庚辰晴, 仕外署, 挾痰比昨少可, 淸北全都事秉翼便, 付上第六天書。 初十日 辛巳晴, 余復服粟米飮, 自今日始仕外署, 赴政府會同, 夜, 日人小川實, 與其女近衛及日人井上重雄·小田音吉來, 作幻燈戲, 慶熙川第二子覲行便, 付上箕營第七天書。 十一日壬午晴, 淸明節, 仕外署,翊贊爲寒食節祀, 出往月谷。 十二日 癸未晴風夕陰, 仕外署,總稅司 柏卓安來談, 與高主事義敬, 往南長洞, 訪英醫불덕病院, 余以肩臂痛甚苦, 得藥水一甁而來。 十三日 甲申陰, 微雨,桂洞 織造局, 新開日語學堂, 今日會同, 未初往見, 學徒三十餘人, 敎師日人占貝, 我國各衙官員數十人·日人十餘人, 皆來會演說, 飮酒而罷, 自明日開學,公州 李甥主事秉珪, 來說去年經亂之苦, 聞之辛楚。
<상358>

十四日乙酉晴, 早赴政府會, 還外署,美公使, 與美國艦長兵官軍醫等, 來署。 十五日 丙戌晴, 行焚香, 早赴政府會, 還外署, 往見齋洞私立學校, 今日會同, 此學校知舊子弟多入,龜壽亦參焉, 申正詣闕, 入嘉會亭,美公使, 與艦長等, 陛見, 公故罷後, 回謝貞洞 美館, 轉往英館, 訪禧在明,總稅務司 柏卓安及仁港 英副領事在焉, 同喫晩飯, 侵夜還豐洞,朴彌甥昌孫來, 承姊主安候, 日館函來, 知觀戰一行, 昨發營向第一軍所在之地。 十六日 丁亥晴, 仕外署, 歸路入桂洞, 日人小川實家幻戲燈會, 照像之人亦在焉, 出示日前外衙所搨余之照像及諸官員像, 皆酷逼眞, 可稱良手也,日本日蓮宗佐野前勵及其同來人相見,佐野, 僧人, 而富於財, 欲自費財力, 募我國生徒, 入日本敎育成就也。 十七日戊子晴, 仕外署, 赴政府會,井上馨及內務·度支 顧問官來會, 論地方月俸, 還外署, 觀日語敎師敎習之事, 撥便, 承箕營十二日出第七天書。 十八日己丑晴, 杜鵑始開, 早往貞洞 英·俄·美館, 還仕外署。 十九日庚寅陰雨, 往日館唔井上馨, 還仕外署。 二十日辛卯晴, 辰時洪室順娩生男, 軀幹壯大, 不似新生兒, 向夕往上村安都事鼎遠家, 賞花, 申肅川家專人便, 付上箕營第八天書。 二十一日壬辰晴, 仕外署, 赴政府會, 箕撥回便, 付上第九天書。
<상359>

二十二日癸巳晴, 仕外署, 赴政府會, 詣嘉會亭, 以上候猶未康和, 奏本捧入。 二十三日甲午晴, 仕外署,佐郞自鄕上來, 轉便聞加平李室生女云, 甚悵。 二十四日乙未晴, 仕外署, 赴政府會, 今日井上馨, 與各顧問官, 會議官制新式, 箕營專撥便, 承本月十七日出第八天下書, 雲峴松亭有獄事。 二十五日 丙申晴仕外署, 赴政府, 與諸大臣, 共詣嘉會亭, 入長安堂奏事, 各部官制, 新式定奪, 以四月初一日實施爲期, 各衙門, 改以各部。 二十六日丁酉晴, 箕營吏李允燮回去便, 付上第十天書, 仕外署, 赴政府會。 二十七日 戊戌晴, 仕外署, 赴政府會, 與各顧問官, 議度支豫算表。 二十八日己亥晴, 仕外署, 赴政府會, 今日亦議豫算表, 轉便, 付上箕營書第十一天。 二十九日庚子細雨霏霏, 桃花始開, 仕外署, 赴政府, 今日奏事, 余以眼眚, 不得進,國分象太郞來談美函事,日本僧佐野前勵·澀谷文英, 來談選入學生事。 三十日辛丑晴, 仕外署, 赴政府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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