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미 교회와 남감리 명칭 문제

바깥 2014. 2. 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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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高陽)땅에 세워진 남감리회 처음 교회
2002년 05월 03일 (금) 00:00:00관리자  lit1109@hanmail.net
남감리교회는 이 땅에 처음 선교를 시작하면서 ‘감리교회’란 교파이름을 사용하였다. 11년 전에 들어온 미감리회는 ‘미이미’(美以美)교회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1906년 연회에서 ‘남감리교 형제들이 동의한다면’ 교파이름을 ‘미감리회’라고 바꾸기로 하였다. 남감리회의 최초선교사는 리드(C.F.Reid)이다. 그는 1896년 8월 14일에 그의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함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선교사 주택 겸 선교본부였던 이 집은 지금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형제교회였던 미감리회 선교사들은 10여 년의 한국선교의 경험을 살려 리드의 한국정착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감리사였던 스크랜턴은 자신이 맡고 있던 상동교회 교인인 김주현과 김흥순을 리드에게 보내 선교에 착수하게 하였다. 남감리교회는 개성일대와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지역을 주된 선교지로 삼았다. 아직 각 교파간에 선교지 분할협정이 이루지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은 다른 교파가 선교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여 선교하려고 했다. 따라서 남감리교회는 아직 미개척지였던 강원도 선교를 목표로 하되, 교두보 확보를 위해 경기도 북부의 요지인 고양(高陽)을 우선적인 선교지로 삼았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인 이곳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첫 번째 역관(驛館)인 벽제관이 있던 곳으로 당시로는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김주현과 김흥순은 ‘인가귀도’ ‘천로역경’과 같은 책을 팔면서 복음을 전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는 백사겸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개종과정이 재미있다. 그는 소경으로 고양 땅은 물론 서울까지 모셔가는 유명한 점쟁이였으나 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소경인 고아를 데려다 키우거나 걸인을 잘 대접하는 등 나름대로 선행을 하였으나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김주현에게 전도지 한 장을 받았다. 그는 무슨 벌레잡는 것 같이 섬뜩한 표정으로 전도지를 받아 아내에게 휙 내어주었다. 
백사겸 소경전도사는. 그는 명 복술가로 돈을 많이 벌었으나 1889년 예수를 믿은 후,점술로 번 돈을 전부 버리고 전도사가 되었다.
며칠 후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보이지 않아 헤매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는 좌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우편에 있는 사람이 은산통을 주면서 “나는 예수이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산통은 소경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통이다. 그는 꿈에서 받은 은산통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바로 며칠 전에 받은 전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전도지를 읽어보니 인가귀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신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다는 말에 통곡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세례를 받았다. 이 날이 바로 1897년 5월 2일로 남감리교 첫 번째 교회인 고양교회가 조직된 날로 리드가 고양 땅에 와서 장년 24인과 유년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였다. 윤치호는 남감리교회의 첫 열매를 기념하기 위해 예배당 용도로 집 한 채를 사서 바쳤다. 한편 교인이 된 후 백사겸은 거짓되게 모은 재물을 정리하였다. 가구를 파니 3천량 이나 되었다. 그는 깨끗하게 벌지 못한 이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이 돈을 몽땅 도적질 당하였다. 그는 허탈하기는 하였으나 불의한 재물을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고양군수가 이 사실을 알고 얼마간 도와주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집을 공짜로 남에게 주고 가족을 이끌고 이 곳을 떠나 행주 땅으로 이주하였다. 소경의 몸으로 행주 땅에 도착하니 소문을 듣고 전도를 해 달라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남감리교에서는 이런 그를 사역자로 임명하였다. 그 후 백사겸은 남감리교회의 유명한 점쟁이 출신 전도인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며 13년 동안 전도인의 사명을 다했다. 은퇴 후에도 혼자 짚신을 만들어 팔며 전도를 계속하였다. 고양 땅에 떨어진 복음은 인근 벽제와 파주 문산 등지로 퍼져나갔다. 이후 선교구역 협정으로 이 지역이 장로교회 구역이 되어 한 동안 감리교회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해방 후 고양감리교회가 재건되어 귀한 신앙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김진형목사(예산지방 죽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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