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보] 덕산교회사건 관련링크

바깥 2014. 2. 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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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지역에 첫 감리교회를 세운 사람은 류제라 이름하는 평신도 사역자였다. 그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에게 직접 쌀을 사서 시장에 파는 중개상인이었다. 그가 주로 다닌 곳은 충청남도 예산군과 당진군 일대로 면천, 덕산, 고덕, 삽교 등지였다. 배를 타고 삽교천을 따라 들어와 쌀을 사서 제물포 등지로 올라간 듯하다. 그는 1893년부터 이 지역을 자주 드나들면서 장사를 하여 농민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동학혁명이 한창이던 1895년에는 선유별관으로 이 지역에 와서 농민들에게 동학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 쌀을 사러 다니면서 비참한 농민들의 생활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쌀을 풀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도움을 받은 농민들은 정부에 그를 면천군수로 세워달라고 청원하였다. 그 당시 면천이 군(郡)이었다. 이들 덕분에 그는 면천군수에 올랐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은 그의 공덕비를 곳곳에 세울 정도로 그를 존경하였다.  류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충청도에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군수 퇴임 후 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한내)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쪽복음을 비롯한 기독교 서적을 사와서 책을 팔면서 전도하였다. 소문을 들은 근방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토론을 하니 믿는 자의 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울에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삼문출판사가 많은 책을 출판하고 있어 그는 감리교 선교사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1897년 당시 감리교 선교부는 수원 부근까지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있었으나, 아직 충청도에는 별다른 선교의 결실이 없던 때였다. 이 무렵 충청도에는 또 하나의 평신도가 자발적인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조원식이란 이로 통헌대부 사헌부 감찰을 지냈는데 복음의 진리를 접하고 낙향하여 지금의 삽교읍 수촌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평신도였다. 류제와 조원식이 기독교를 전파하여 점차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이들을 모함하고 탄압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박덕칠이라는 불량배 때문이었다. 박씨는 서울에 올라가 기독교서적을 사가지고 다니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 대천 류제에게서 책을 가져왔다고 떠들고 다녀 류제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생긴 것이다. 또 하나는 관리의 박해로 덕산군수 도종환이란 이가 류면천과 조원식을 탄압하기 위해 그의 하인들을 잡아 가둔 것이다. 덕산군수는 류면천과 조원식을 가르켜 겉으로 서교(西敎) 교당이라 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미혹하는 동학 잔당이라고 규정한 후 방을 붙여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마침 서울에서 류제의 초청으로 전도지원을 위해 덕산에 내려왔던 전도사 최병헌과 교인 박환규가 이를 보고 서울에 올라가 “덕산교회”란 제목으로 <조선그리스도인 회보>와 <독립신문>에 게재하였다. 1897년 10월 27일자와 11월 3일자에 연속으로 게재된 <조선그리스도인 회보>의 내용은 류제가 박덕칠과는 무관하다는 것과 몰지각한 덕산 군수의 박해를 비판하는 기사였다. 이 기사로 인해 선교사가 직접 가지고 않았고, 전도인을 보내지 않은 충청남도 예산과 당진, 서산 등지에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런 박해로 인해 덕산 주변의 감리교회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스크랜턴 감리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 알려진 이 일대의 자생적인 감리교회 신앙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898년 내한한 스웨어러(W.C.Sweaer) 선교사에게 서울이남 선교를 전적으로 맡김으로 충청남도 서해안 일대의 선교가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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